이기화 고창문화원장
고창출신 철학시인 이추림의 생애와 문학성
입력 : 2008. 03. 10(월) 11:04
哲學詩人 李秋林의 生涯와 文學性

고창 향토문화연구소장 이 기 화

고창문화의 정립에 큰 몫을 했던 현대문학사의 두 별이 사라졌다.
한사람은 해라면 水洛 출신으로 동국대학 교수였던 송혁(宋赫)시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난 겨울 갑자기 타계한 심원면 하전 태생의
철학시인 이추림(李秋林)이었다. 여기에 이추림 시인의 생애와 문학성을
간추려 향토문화 정립에 보태고자 적는다.

1. 생애
1997년 12월 27일 새벽 2시 30분…….
향토출신 중견작가 李秋林 詩人이 이승을 하직한 시간이다.
삼가 명복을 빌면서 여기에 향토문화 자료 및 시인 이추림 문학의 정립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입장에서 유가족과 고향 일가들이 들려주는 주변담을 종합하여 개괄적으로 정리해 두고자 이 글을 쓴다.
그는 1933년 5월 23일 고창군 심원면 下田里에서 全州李氏 完豊大君 (李元桂-朝鮮 李太祖王의 伯氏)의 둘째 曾孫인 月坪君의 16대손 李學奎(1912~1965)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東柱이다.
그는 어려서 5살 때까지 고향집 계모 할머니 슬하에서 메마르게 자랐다.
그때 그의 별명이「맨발」이듯, 진짜 알몸으로 가난과 부딪히며 토박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의 문학적 재질은 아무래도 아버지로부터 稟受된 듯 싶다.
그의 아버지는 古阜에 사는 당숙에게서 百家争鳴의 漢文修學을 마쳤는데 그 文章이 수려했다는 것이다. 청년기를 앞두고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한 이래 서울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젊은 시절에는 만주나 중국 등 이역에서 방랑생활을 꽤나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文學辟이 남다르게 심했던 그는 30대 중반에야 귀국하여 서울에서 안착한 이래 한때는 극단「신협(新協)」의 연출 시나리오를 도맡았다고 한다. 이런 사이 秋林은 서울에 홀로 계신 어머니의 주선으로 서울로 올라가 학업을 시작하여 培材中․高를 거쳐 아버지가 바라시던 정치에의 꿈을 살려 당초에는 高麗大學 政治外交學科를 2학년까지 마쳤는데 갑자기 中病이 났다는 것이다.
어렸을적 할머니 밑에서 서럽게 살아 외로웠던 부모님의 주린 정을 애틋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고민과, 찌들린 집안 사정을 고려해 볼 때 정치와 돈의 절대 함수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일시 심리적 갈등에 빠져 들게 되어 政治學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왠지 賦禀으로 타고난 文學에의 鄕愁에 심취되면서 自己發見의 개성있는 전공을 지향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유있는 반항에 부모님도 이해가 되어, 마침내 변신의 단안을 내려 서라벌藝術大學文藝創作科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未堂 徐廷柱 선생을 만나게 되어 이른바 문하생으로 入門, 文學에 정진할수 있게 된 것이다.
1954년 대학을 마친 그는 就職도 어려운데다 어수선한 6․25전쟁 休戰期의 분위기에 휩싸여 혁신을 의식하는 젊은 집단에 가담, 「오시회」의 대표 간사를 맡게 된다.
여기에서 인연이 되어 현 혁신계의 원로인 白基玩씨 등과 연관을 이루어 사상적으로 잠시 혁신계열에 발을 묻히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뒷날 5․16 군사정권에 몹시 시달림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뒤 정치에 退物心이 났던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당시 李承晩대통령의 정치노선에 가담이 되어 民族主義 사상에 열을 올려 「黑人社」라는 잡지사를 경영하면서 국제정치무대에서의 李承晩 빛내기에 빠져들어 청년기를 불사르기도 하였다.
自由党 말기인 1959년 당시「世紀日報社」를 인수하기로 계획이 짜여 한창 열을 올리는 도중에 4․19학생 의거가 일어나게 되어 그의 꿈은 一場春夢이 되고 말았거니와 그의 정치활동의 제스춰도 여기에서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60년의 政変에 그는 정치활동에 대한 부정적 의미부여가 작용되면서 손을 씻고 자기발견의 분수령을 넘어 오랫동안 갈등에 묻혔던 자기의 전공인 詩人의 길로 매진하게 된다.
여기서 詩創作의 가속력을 얻은 그는 자기 경지를 모색하게 된다. 심취의 늪 속에서 1963년 「自由文學」을 통해 31세에 文壇에 데뷰하였다.
이처럼 잡념을 털고 문학의 외길을 승승장구하는 터에, 5․16 軍事革命이 일어나 朴正熙 대통령이 革新系列을 정치적 의미로「어필」하게 되면서 백기완 등과 제휴를 갖는 마당에 그의 前歷을 알게 된 軍政이 李秋林에게 동참의 권유를 하였으나 전혀 吾不関焉하였다.
그러나 군정당국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온갖 수단 방법을 강구하여 어느 때엔 협박의 분위기로 또 달리는 어느 한 대목을 뚝 떼어주기로 조건을 제시하는 회유책등을 써서 그를 유혹하였으나 문학정신으로 다져진 그의 확고한 선비의식은 끝내 搖之不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회유하러 나섰던 情報要員들이 추림을 그냥 놔두었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곤혹스러운 荊棘의 날들이 그를 맞이할 것은 不聞可知였다고 한다.
백기완씨와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그 끈끈한 정을 묻어둔 채 그는 維新時代의 沮止線이었던 6․3사태를 먼 발치에서 응시할 뿐 오히려 잔잔할 수 있었다. 政局은 바야흐로 運動圈시대를 낳는 사태를 유발하게 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극복해 내는 용력을 발휘, 정치와는 타협을 거부하고 깨끗이 손을 뗄 수 있었다. 하마트면 文壇史의 異端者가 될뻔 했던 그 어려운 고비를 용케도 피한 것이다.
그 숱한 유혹을 물리치기까지에는 문단 선후배들의 절대적인 격려와 부인의 지극한 내조, 不義와의 野合을 禁忌로 여겨온 家風의 영향, 그리고 본인의 확고한 신념이 문학의 세계로 계속 정진하게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혈혈단신으로 독대하여 흔치 않게 軍事獨裁에 저항하는 筆致를 휘두른 것이다. 그것도 적나라한 直筆로 대응하고 꾸짖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무런 橋頭堡나 堡壘도 없이 横出과 曲筆을 단호히 거부하고 당당히 맞설수 있는 그의 가상한 용단의 바탕은, 아무리 보아도 전통적으로 역사의 患難에 항상 義를 지켜온 그리고 세계 최초의 민권운동인 東學農民革命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義兵抗爭의 本鄕으로서의 義鄕 高敞의 기질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를 앞두고 어수선한 세상을 관조하다가 벅차게 엄습해 오는 고독을 순화하고 삶에의 어려움을 극복해 내고자 洪性裕 선배와 함께 「新思潮」경영에 한 몫을 바쳐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는 몇가지 自營業을 경영하여 충실한 생활인으로 인생의 経倫을 쌓으면서 詩作에 專念하였다. 1985년 출판사「明文堂」의 主幹을 맡아 10년 동안 도서출판 사업에 기여한 이후 1995년에 은퇴하여 가업을 다스리면서 조용히 일생을 정리하고 幽明을 달리하였다.
유족으로는 1960년에 貫鄕이 忠州인 池允俊 여사를 만나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秋林의 詩脈은 文翰之家로 알려져 있는 그의 先代에서 그 연원을 찾아 볼수 있다. 秋林家는 그의 20대조 李元桂가 고려 우왕 때의 장군으로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고 19대조 李天佑는 태종 때의 兵曹判書, 朝鮮開國功臣으로 또한 鄭道伝의 난을 평정, 定社공신에 책록되어 完山府院君에 피봉되고 賜牌地로 潭陽盆地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게 됨에, 평소 吟風咏月의 풍류기질이 넘쳐있는 18대조 麗陽君 李宏이 山紫水明한 담양땅 月山으로 내려왔다.
17대조 月坪君 李宗仁이 역시 이곳에 눌러 자연을 벗삼으며 文氣를 크게 발휘, 뒷날 담양땅이 한국 詩歌文學의 産室이 되는데 밑거름이 되었고 그 주역인 俛仰亭 宋純 松江 鄭澈 등이 그를 私淑하기에 이른다.
이와같이 왕가와 공신의 후예로서 식음이 넉넉함에 騒雅之道가 트일 수 밖에…….
추림의 12대조 李聖素는 丁卯․丙子胡亂을 피해 특히 바다를 즐기는 풍류가 넘쳐 산수와 魚草가 넉넉한 고창 禪雲山 자락 아래 조용한 갯가 마을(心元面 下田里)을 設基하고 대대로 그 문맥을 면면히 이어 오늘의 秋林을 낳게 한 것이다.

2. 文學
秋林은 보기 드물게 주로 長詩 작품을 많이 썼다. 1963년「자유문학」에 장시 〈태양을 火葬하고〉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래 34년 동안 長詩集 3권, 聯作詩集 5권, 詩集 3권, 詩畵集 1권 등 무려 12권에 약 천편의 시를 썼다. 장시의 분량으로 치면 2천 편은 족히 되리라 믿는다.
그의 文學을 두고「語文閣」에서 펴낸 〈한국문예사전〉에 아래와 같이 프로필하고 있다.
「사회현실을 超現實主義 手法으로 엮어, 새로운 美學을 驅築하는 한편 언어의 蕪雜속에서도 돌발적이며 폭발적인 이미지의 연쇄적 연결을 보여, 현대시의 異斷的 領域을 實驗하고 있다.
매우 간결하게 농축된, 그러면서 빈틈없이 정확한, 핵심적 표현으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여기에서는 매우 외람스러우나 家鄕文學 同好人의 입장에서 그의 長詩集〈太陽을 火葬하고〉등 몇 券의 詩文學에서, 그의 賦性과 特長이 피부에 와닿는 몇 聯의 詩句를 내세워 그의 文學을 斷篇的으로 素描하는선에서 머므르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그의 詩는 되는데로 뒤섞여 거칠고 어수선한 自然草의 갈피 같으나 그속에는 괴로움과 번뇌에 가득찬 그나름의 哲學이 있고 그 철학의 바탕에는 文翰의 源泉을 이루어왔던 그의 오랜 家統에서 투철한 선비意識이 內在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그의 苦悩에 찬 詩哲學은 세계․ 인생․ 지성 등의 근본원리와 이에 따른 自己道理 그리고 門楣의 伝世之道인 선비의 길을 의식하면서 조상대대로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속에 이루어낸 孤高한 順理의 哲學이 秋林代에 이르러 깡그리 霧散되고만 自壊意識의 「딜레마」를 두고 이를 自艾하고 贖良하면서 祖上과의 對話的 窓口를 통한 무난한 이음새를 講究하고자 하는 自己克服의 表出로 点綴해 두고자 한다.
그의 詩名에 대한 低流도 이와같은 脉絡에서 觀照해 볼 때 절실한 自己定立을 모색하기 위한 異端者的 領域을 실험해 보는 의도에서 超現實主義的 手法을 導入하고 風靡해 본 것으로 수긍해 주고 싶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사회불안이 가중될 때 「프랑스」의「츄리히」에 사는 「트리스탄 차라」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운동이 일어났다.
기존의 전통적인 一定한 藝術觀念을 두고 모든 旣成觀念을 追放, 전통적인 藝術形式을 否定하며 前衛的이고 實驗的인 면에서 反抗的인 不滿을 부르짓고 破壊 蹂躪을 즐기고자, 술과 여자, 誇大廣告를 사랑하는 氣風의 現實主義 운동이 맨처음 일어나, 20세기 유럽의 文學․美術의 새로운 운동으로써 「다다」운동이 일어 나게 된다.
이 예술운동은「파리」의 「몬단들칼」에서「브르통」, 「아라공」,「수포」등 一群의 현실주의자인 退癈詩人들이 따라 나서 主制的 宣言을 함으로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文藝思潮를 이루게 되는데, 여기에서 「다다」의 주장은 문학․미술에 있어 전통과 어법 등의 一切制約을 벗어나 개인을「도그마」와 형식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자는 극단적인 反理性主義로 기존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戰後意識에서 無方向의 運動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회질서가 차차 잡혀져 그 중요 세력들이 「쉬르리얼리즘」(超現實主義)을 또다시 提唱하면서 1924년에 대체적으로 종막을 고하게 된다.
이때 사회질서는 차츰 회복이 되지만 또다시 經濟不況의 惡条件을 계속 누리게 되면서 유럽의 예술인들은 새로운 갈등을 맞게 되어 1924년 프랑스의 詩壇과 畵壇에서는 현실 이상의 現實主義-현실을 초월한 새로운 예술경향이 일어나 극히 近代的 의식의 藝術化 미술적인 㝍實主義의 의미에 換言하게 된다-를 추구하게 되어 현실적이 아니고 작가의 心像속에 비쳐있는 觀念上의 현실을 좋아하게 되는 새로운 藝術主張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는 모든 비현실적 幻像이 있고 현실적이 아닌 想像이 전개되는 꿈과 같은 현실, 마취적인 현실임을 의식하게 되어 帰結的으로 非現實의 현실이라는 超現實이 된다는 이론인데 바꾸어 말하면 자연에서 직접 얻어지는 心像 대신에 潛在意識의 심상을 새로운 비현실적인 결합에서 현대적 문학 예술의 流波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한번 더 바꾸어 설명하면 다다이즘․ 立體派․ 表現主義를 계승, 夢想․ 浪漫的․ 交錯․ 象徵․ 非構造化․ 形式의 無視․ 色彩의 閑却 등 매우 주관적이고 超現實的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自覚한 自我로 보면 中心喪失, 分裂症, 不調理이나 精神分析學에서 보면 현대문화에 대한 批判的 形式의 藝術이라 할 수 있고 推想藝術과는 달리 主題, 心理, 詩, 措㝍의 要素가 강렬하게 投影되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
이는 1924년 文學分野에서 「브르똥」,「아폴리네르」,「콕토」,「카프카」. 美術界에서「달리」,「피카소」,「미로」「키리코」「에른스트」. 音樂界에서 「사띠」. 映畵界에서 「레이」등이 主軸을 이루는 가운데 대표자인「앙드레 브르똥」이 超現實主義로 定立 宣言하는 데서 발단, 프랑스를 중심으로 歐美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전세계에 파급되는 文學藝術의 新思潮로 대두, 우리나라에도 1920년대 말경에 선풍적 대유행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무렵 문학청년이었던 秋林의 아버지 李學奎도 서울에서 학창시절이었는데 超現實主義 文藝思潮의 流行처럼 밀려든 새로운 思想的 傾向에 心醉되어, 차오르는 自己煩惱를 끝내 이기지 못하여 1930년대까지 滿洲로 시베리아로 中國으로 10여년 동안이나 放浪癖에 깊숙히 빠지는 超現實의 세월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비록 一止一処로 流離漂泊한 간접적인 行身일지얼정, 적어도 秋林에게는 反響있는 詩禮之訓으로 넉넉한 行步거리는 될성 싶다.
아니 초현실주의를 追求한 그의 手法은 이와같은 順理的 視覺에서 고려할 때 비현실적인 結合의 表出로 얻어진 潛在意識의 당연한 心像的「Image」로 받아들이고 싶다.
또한 그의 詩作의 言語驅使面에 있어서도 그가 異端的 領城을 實驗的인 架橋를 驅築하면서도 蕪舛이나 虛實없이 突發的이고 爆發的인 感覺的 心像을 사슬처럼 이어 맺는 手法의 超現實的 美學追求는 그다운 文翰之家의 逸品的 消化力으로 評價해주고 싶다.

그가 詩人이 되고자 한 긴 터널을 빠져나온 所感을 아래와 같은 새김질로 매워놓은 것을 보면 蕪雜한 言語驅使의 連繫에서도 그의 現實을 超越한 새로운 世界를 探究하는 넉넉한 創作技法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詩쓰는 고통의 즐거움 때문에
저는 詩人이 되었습니다.

사랑함으로서의 鳥葬까지도
행복할 수 있어 저는 詩人이 되었습니다.

말에서 태어나는 實體의 손실과 失敗와
가난쯤 기쁨으로 이겨낼 지혜가 필요해
身熱을 건축하듯 저는 詩人이 되었습니다.

영혼과 바람조차도 컬러사진 박는
오묘함의 가능성 때문에 저는 詩人이 되었습니다.

일과성 삶의 행복과 이 불행
영원과 평범의 희노애락을
불의 碑塔에 새기듯 깊이 쪼아낼 수 있어
저는 막강하게 고독한 詩人이 되었습니다.

未知의 詩人을 포함하는 많은 분들에게
실패하는 共産主義者처럼
똑같이 知的 자밀 골고루 나눠 지진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神의 詩를 대하는 듯 저는 詩人으로 남을 것입니다.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5․16이 歷史를 먹칠해 놓았을 때 시인들의 거지반이 자라목이 되었다는데 秋林은 우리 代에서 보기 드물게 뼈를 추려낸 騒客다웁게 오직 氣槪와 情炎으로 몸을 사른 우뚝한 化身으로 맞서 그들을 直視하고 直叙 直言 直筆로 銳鋒을 다스려 義를 崇尙해온 高敞人의 氣質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모두들 이유없는 무덤처럼 깊은 熟眠에 빠져 있을 때 그는 孤高한 抵抗의 旗手가 되었다. 軍靴발굽의 숨막힐 세월내내 그는 굴절된 視覺들을 두고 하늘을 우러러 叱咤하며 切迫한 鬪魂으로 뜨겁게 抗節하였다.

한때는 막강한 親日派였던 그들
무언가 할 일이 아직 그러한 군대놈들에게도
더 많이 남았나요
그런데 市民들은 다
어디로 숨었습니까
指紋法이 무슨 소용
텅 빈 여기서
이거 누구의 문둥이 같은 종놈들입죠.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一節)


그렇지 않아도 울화통 터지는 彊域에
잿더미 안에서 당기는 목마름같은
군인들의 세도만 치솟는
텅 빈 봄은 왜 이렇게 늦는 걸까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一節)

또한 그는 움츠러들고만 숨죽인 詩人들에게도, 機変百出로 曲筆하던 文人들에게도 詩人다운 回歸을 위해 渾身의 起床나팔을 氣尽하게 불어대 家鄕의 선비적 氣質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市民속으로 전진하는 軍團旗처럼
휘황히 나부끼는 버섯구름 말씀이야
新興軍人 세력 앞에 오금도 못펴는
看板詩人 녀석들
조용한 死刑囚 가슴 덮는
색깔보다 더 진한
빈 가지 가지 마다에
뿌리는 허전하고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一節)

그 세월 -
文化藝術이 藝術文化로 물구나무를 서도 金日成의 신들린 망석중이 마냥, 蕪酌으로 軍事文化를 잉태하던 詩人들 앞에 秋林은 고단한 터주자리에서 끝내 悠悠自適하였다.

저는 政治詩人
敎授詩人같은 총천연색 詩人은 되지 않겠지만
저의 말 노동의 옹호를 위해 단호한
순교자가 되겠다는
격앙된 결심으로 天真無垢의 童心
自然
終末의 첫소릴 내가 첫 번째로 들어도 좋을
영원한 詩의 고향인 사랑이 넘치는
창고 안을 결단코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一節)

- 苦惱하지 않는 詩人
- 哲學이 없는 詩人
- 텅 빈 체 요란한 詩人
- 더는 들어줄 수 없는 매미 詩人
- 더는 챙겨줄 수 없는 似而非 詩人을 놓고, 애비詩人 애미詩人 師父詩人까지도
벙어리가 되고마는 지금 세상에 어쩌다 남의 눈치 살피느라 桎梏이 넘쳐 쏟아질 것만 같이 막다른 판국에 그래도 秋林만은 詩人다운 詩人답게, 선비다운 선비답게, 해야할 말을 해야 할 자리에서 서슴없이 당신의 哲學 그대로 모진 叱咤와 호된 批判으로 胆汁은 내려도, 허나 정녕 그들을 일깨우고 사랑하지 않았던가…….

꽃을 바람이게 바람을 꽃이게
하는 것이 시의 條件으로 하여
詩人은 시로 말해야 하는 鐵則을 두고 시는 항상 出發하는 사랑으로 쓰여야 한다.
詩는 사랑을 표현하는 생각으로 不斷한 테스트를 통한
새로운 位置變化 그 方途가 絶對氷壁이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內觀하면서 前進, 치솟아야 한다.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에서)

그는 또한 그의 詩作哲學을 아래와 같이 代弁하여 表出하고 있다.
「어떤 集團, 어느 누구에의 策略에도 나의 詩만은 방해받을 수 없다는 一貫된 思想으로 詩에의 孤獨, 恐怖. 重病患者와 偏執症 重患者가 되어 수치스러운 벽의 풍경을 陰数化 내지는 positive하는 것까지 사양치 않는 나의 작업이 抒情的 獻呈詞는 못될지언정 많이 성략되고 응축된 同時代의 튼튼하고 뛰어난 構造物로 남아서 종신서원하는 정직한 詩人으로서의 告解資料가 됐으면 싶다」
(시집 : 通過駅, 驅步하는 語彙들 自序에서)

「30여년간의 詩를 쓰며 앓는 希悅의 맑은 고통속에 불빛을 가(耕)는 勞役의 보람으로 극약바른 注射바늘보다 더 날이 선 시커먼 어둠의 층계 끄트머리에 부드러운 녹두꽃빛 이슬이 송송히 매달려있곤 해서 眷属들에게는 未安한 일이나 詩의 發明을 향한 끊임없는 情熱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指弾의 나날이 되게 한다」
(시집 : 불의 弔辞 後記에서)

또한 당신의 氣槪있는 稟性위에 꾸준히도 精進해 온 自己哲學을, 사랑의 昇化로 꽃을 피우고 그 結實을 거두고자 하는 真摯한 自己省察이 돋보이기도 한다.

「한톨 작은 겨울씨앗같은 나는 황량하고 피폐한 벌판에서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어둡고 춥고 깊은 안에서 사랑의 힘(詩)을 키워 오느라 무진히도 애써오고 있지만 보기보다 훨씬 초라한 형세이다」

작은 둥지 속의 한 개 알은 작지만
그것들이 궁글어 모여서
하늘의 음악으로
하늘을 덮는 날
시름시름하던 땅과 바다
온통 사랑의 이웃
섬이다.
(시집 : 太陽을 火葬하고 中의 “사랑의 完成”에서)


이와같이 秋林의 詩는, 그의 사랑은 얼핏하면 헝크러진 雜草무덤이나 難解詩 같은 때깔이 있지만, 5․16으로 而立의 才月을 도둑맞은 그날-
軍靴짝의 荆棘을 屈辱없이 克服하고
軍靴짝의 懷柔를 끝내 물리쳐 낸
軍靴짝의 庄倒를 堂堂히 獨對하고 만 濃縮된 그의 熱불은, 마침내 無條件反射의 파동이 일어 反俗의 活佛이 됨으로써, 영생을 얻은 白毫로 화신, 無量世界를 비치는 聯作詩와 長詩로 지금껏 이어 내린 것이다. 그것도 밑구멍 난 거미줄 마냥 도도하게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영구히 우리 곁에 머물러 麝香이 되고 望月이 되고 불사조가 되는 횃불일줄 믿는다.
어떤 이는 그를 불굴의 저항시인으로
어떤 이는 그를 蕪雜한 난해시인으로
어떤 이는 그를 幽幽한 철학시인으로 客評들을 내놓고 있다지만 그는 대대로 철학을 먹고 철학을 삭힌, 철학으로 溫床하여 不滅의 魂詩를 써온 그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시로 말해야 하는 시인의 본분을 굴절없이 지켜낸 분으로 메마른 文苑의 현실 앞에 머문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귀감이 될 줄 믿는다.




○ 李秋林 詩人의 文歷

文壇略歷
63년 自由文學에 登壇
66-82년 韓國文人協會 理事
68-78년 國際 펜 韓國 本部 理事
71-90년 韓國 現代 詩人協會 理事
71-74년 韓國 藝術文化 倫理委員會 常任 審議委員
74-77년 韓國 藝術文化 倫理委員會 審議 室長
82-90년 韓國 自由詩人協會 理事

主要詩集
62년 長詩集 「歷史에의 敵意」
67년 聯作詩集 「彈皮 속의 旗」
83년 長詩集 「불의 弔辞」
86년 聯作詩集 「富川日記」
87년 聯作詩集 「印度詩篇」
89년 聯作詩集 「불의 椅子」
90년 詩集 「杜甫氏네 다 큰 애들의 後日譚」
91년 詩集 「通過駅, 驅步하는 語彙들」
91년 詩畵集 「流動하는 生의 原形質」
92년 聯作詩集 「꽃은 씨안에 있습니다」
93년 長詩集 「太陽을 火葬하고」
96년 詩集 「큰 余談」
98년 테마 語錄 1.「말, 마음뿐의 마음이 말이다」
98년 테마 語錄 2.「시와 함께 산다는 것」

主要 受賞
제9회 「韓國文學賞」本賞 受賞
제1회 「文藝思潮文學賞」本賞 受賞
제10회 「韓國文學評論家協會 創作部門賞」本賞 受賞
제14회 「韓國現代詩人賞」本賞 受賞 외
1998. 「韓國自由文學賞」本賞 受賞(결정)

-1998년 1월 碧梧峰下 龍山華門에서-

고창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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